《에릭(Eric)》은 2024년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영국 심리 미스터리 드라마로, 주연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실종된 아들을 찾으며 내면의 괴물과 싸우는 아버지 ‘빈센트’ 역을 맡아 깊은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6부작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겉으로는 실종 사건을 다루지만, 실제로는 상실, 죄책감, 사회적 무관심, 가족 해체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심리 드라마입니다. 특히 주인공에게만 보이는 ‘괴물 인형 에릭’이라는 환상을 통해 현실과 망상의 경계, 자아의 균열, 회복의 단초를 시청자에게 시적으로 전달합니다.
실종의 시작, 그리고 부성애의 무너짐 (실종)
1980년대 뉴욕, 화려한 도시 이면에 가려진 어두운 골목과 차가운 구조의 틈에서 이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빈센트 앤더슨은 뉴욕 공영방송국에서 인기 어린이 인형극 ‘굿데이 선샤인’을 제작하는 잘 나가는 프로듀서이자 크리에이터입니다.
그러나 그는 직업적으로는 창의적이지만 성격은 폭력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감정 표현에 서툽니다. 아내 캐스린, 그리고 9살 아들 에드가와 함께 살고 있지만, 가정은 이미 감정적으로 고립된 상태입니다.
어느 날 아침, 에드가는 아버지와의 갈등을 뒤로한 채 혼자 학교에 가다가 실종됩니다. 이 사건은 빈센트의 세계를 완전히 붕괴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경찰은 실종 수사를 시작하지만 사회 시스템은 비효율적이고, 언론도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빈센트는 아내와의 관계가 악화되고, 세상 모두가 아들을 잊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와 죄책감, 무력감을 동시에 겪습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아들을 찾기로 결심하며 점점 심리적 불안정 상태로 진입하게 됩니다.
괴물 인형의 출현, 내면의 붕괴 (괴물 인형)
빈센트는 아들이 실종되기 전 그려주었던 괴물 인형 그림을 떠올립니다. 에드가는 자신이 만든 인형 ‘에릭’을 아빠의 프로그램에 출연시키고 싶어 했습니다. 크고 무섭지만 마음은 따뜻한 괴물. 이것이 바로 ‘에릭’의 출발점입니다.
며칠 후, 빈센트는 거대하고 털이 많은 파란색 괴물 ‘에릭’이 자신의 앞에 나타나 말을 걸고 행동하는 환각을 경험합니다. 그는 점차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에릭’과 함께 뉴욕을 누비며 단서를 찾아다니기 시작합니다.
에릭은 단순한 상상이 아닌, 빈센트의 내면이 투사된 존재입니다. 그의 분노, 자책, 공허, 후회, 사랑이 뒤섞인 형상으로 나타난 이 환상은, 빈센트가 자신을 마주하는 가장 원초적인 방법이자 마지막 자아의 잔해입니다.
빈센트는 직장을 잃고, 알코올 중독에 빠지며 사회적으로 추락합니다. 친구도, 아내도 등을 돌린 그에게 남은 건 ‘에릭’뿐입니다. 그러나 이 괴물은 그를 지켜주는 존재가 아니라, 그가 외면해온 진실을 들이대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감정의 덩어리입니다.
진실의 도달과 고통스러운 회복 (자아 붕괴)
드라마는 단순한 실종 수사물이 아닙니다. 빈센트가 고군분투하며 발견하는 단서는 에드가와 같은 처지의 아이들, 즉 홈리스, 성소수자 청소년, 빈곤층 가정의 아이들이 ‘사회가 관심을 주지 않는 실종자’가 되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그들 속에서 에드가를 찾고, 그들 속에서 자신이 아들을 향해 저질렀던 감정적 학대와 방임을 비로소 자각합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직접적으로 아들의 실종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로서의 부재와 외면’이 아이를 점점 멀어지게 만들었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에릭은 점점 그에게 화를 내고, 그를 몰아세우며, 진실을 말하라고 요구합니다.
드라마 후반부에서 빈센트는 에드가가 남긴 흔적들을 따라가며 그가 마주한 두려움과 상처, 그리고 존재 그 자체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내가 그 아이를 잃은 게 아니라, 아이가 나를 놓은 것이다.” 이 고백은 빈센트의 감정적 해방이자, 자기 파괴에서 벗어나는 전환점이 됩니다.
에릭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집니다. 그것은 죽음이나 파멸이 아니라, 빈센트가 더 이상 자신의 그림자에 휘둘리지 않고 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이제 그는 에드가의 부재와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에릭》은 실종 사건이라는 외피를 두른, 내면 심리의 풍경화입니다. 괴물은 세상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외면한 감정, 방치한 기억, 미뤄둔 책임 속에 살아 있습니다.
빈센트가 ‘에릭’이라는 환상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절망을 견디며, 용서에 도달하는 과정은 단순한 스토리텔링을 넘어 시청자에게도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누구를 잃고 있습니까?”
이 드라마는 화려한 결말을 제공하지 않지만, 상실을 견디고 살아가는 법을 조용히, 하지만 단단히 말해줍니다.